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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담론으로의 사랑

2025-02-07

담론으로의 사랑

사랑. 누구나 쉽게 거창한 얘기를 늘어놓지만 함부로 답을 내놓을 순 없는 주제다. 우리 대부분은 이게 침묵하는 방법으로 그 낭만과 신비주의를 지킨다. 낭만주의 문학들은 결코 사랑을 적시하지 않는다. 봄날의 꽃내음처럼, 스치는 해변의 바닷바람처럼 휘발되는 인상에 묻어 그 신성함을 지켜낸다.

하지만 오늘 내가 토해내는 문장들은 이런 신비로움과는 다른 것이다. 내 내면 깊이서 몰아치는 생각들, 어쩌면 가까스로 인간을 지탱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신앙심에 대해 반기를 들어보이는 것이다. 이 반항심은 아주 위험하여 인간 깊숙히 있는 희망을 무색하게 만들 수 있다. 삶의 이유를 사랑으로 정의하는 낭만주의자들의 세상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문장들이다. 낭만주의 시조에 살아보았던 사람으로써 나 스스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됐다. 결국 난 자신을 적셔오던 담론을 무너트리는 시점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정의 내릴 수 없다. 적어도 언어로 보았을 때 그 범위와 다양성이 여전히 확장중이라 하나의 구조로 담아낼 수는 없다. 다만 소유욕이 사랑의 기작에 작용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에리히프롬은 건강하지 못한 사랑의 기반에는 소유욕이 있다고 말했다. 상대방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 궁극적으로 외부의 자아를 내면화 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분명하다. 이는 우리가 느끼는 설렘, 매력, 환상을 결정한다. 무척이나 당연한 것이 인간은 본래 자연과 교감하는 존재다. 외부를 탐구하면서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존재다. 이런 자아에 동일하게 복잡한 외부의 자아를 마주한 다는 것은 무언갈 초월하는 감각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자아와 자아의 연결에서의 초월성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교감을 통해 외부의 자아와 통합됨을 느끼고 자아의 확장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는 남성-여성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아와 자아. 발달된 경우 동물과의 교감에도 비슷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적 대상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이런 연결과 확장을 초월성으로 인식하는 것이지 남녀의 유별난 관계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가 내뿜는 담론은 남녀 한쌍이 운명적으로 만나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고 서로에게 신성화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쯤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남녀 한쌍으로 사랑해야 하는가? 어째서 한번에 두명, 세명, 다수의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우리가 다수 대 다수의 사랑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사랑하는 상대방에 대한 신격화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이유가 그곳에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다. 사회가 이에 가담하는 것이 남녀 한쌍의 고립된 관계망과 그 자식들로 이루어진 가족상을 마땅한 것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도태된 인간상으로서 도덕적인 결함을 지녔거나 경쟁에서 패배한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존재다.

일부다처제, 다부 일처제는 이런 도태된 인간상을 증대한다. 다수가 구원받을 기회를 한 명이 독차지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자신도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이런 현상을 방지하면서 사회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최초의 민주적 제도에 불과하다. 사랑의 신성함보다 사회 생산성 측면의 가치판단이 선행된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다수 대 다수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다. 다수 대 다수의 우정의 칭송받듯이 우리는 다수 대 다수의 사랑이 칭송받는 사회일 수 있다. 다만 사회 규범을 통해 저지되었을 뿐이다.

이런 규범의 발상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동조했다. 남성은 여러 여성과 교감하면서 책임질 필요가 없으나 여성은 여러 배우자를 맞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면서 자식을 부양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겐 다수의 남성보다 자신만 바라보는 한명의 남성이 더 필요하다. 가정의 버팀목으로서의 남성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여러 남성과 교감하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립된 여성사회로서의 권력을 형성하면서 그 지배력이 사회 전반으로 흐르도록 기능한 것이다. 이런 여성간의 집결력과 연대감은 여전해서 현대 사회에서도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회 규범이 약자를 보호하고 특히 여성우대 정책들이 채택되는 대에는 여성의 조직적인 행동이 가압한 결과이다.

그들의 연대적인 행동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생존전략이 있듯이 그들의 전략일 뿐이다. 여성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거시적으로만 드러나는 사회적 지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남녀간 사랑의 신성함과 낭만, 그리고 얽혀있는 도덕적 규범들은 여전히 환상이라는 점이다. 모든 가치가 그렇듯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사회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지금까지 만들어낸 담론일 뿐이다.

이런 해석은 과거 가정상을 보면 더 뚜렷하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하는 가정이 태반이었고 여러 배우자를 두는 것이 도덕적 결함이 되지 않는 사회였다. 지역사회나 가문이 가정을 형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부양했기에 현대처럼 그 규범이 강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이는 것은 개인주의의 확산 때문이다. 우리는 더이상 가정에 의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 여성이 독립적 주체로서 인정받으면서 남성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졌다. 과거처럼 연애사에 대한 규범과 도덕관념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카뮈의 말을 빌려 조금 더 말을 이어나가자면 카뮈는 세상의 부조리를 만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자신을 적시는 담론을 다방면에서 탐구하여 세상의 무질서함과 혼돈스러움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사랑은 정적이고 고여있다. 우리는 본래 여러 지적대상과 교감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우정처럼 말이다. 다수 대 다수의 사랑은 허용 가능한 것을 넘어 추구해야할 방향성일 수 있다.